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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신궁 강채영, '제 29회 타이페이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2관왕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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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함께한 체육 100년
2020.08.26 2,116
  • 년월호 2020년 8월호

Sports in KSOC

History 100

 

민족과 함께한 체육 100

 

대한체육회가 출범한 지 어느덧 한 세기를 맞았다. 1920713일 조선체육회로 고고성을 울린 대한체육회는 100년의 연륜을 쌓는 동안 숱한 시행착오와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꾸준하게 성장해 우리나라 체육을 세계열강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를 거치면서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한국체육 100년을 되돌아본다.

 

. 이영만 대한체육회 100년사 편찬위원, 전 경향신문 대표

 

땀과 인내로 선 정상

서울과 런던의 거리는 예나 이제나 똑같다. 9,095km로 비행기를 타면 12시간쯤 걸린다. 그러나 1948년의 런던은 멀고멀었다. 1948621YMCA 회관에 집결한 67명의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단은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서울역까지 도보로 행진했다. 서울역에서 기차로 부산에 간 후 배편으로 일본 후쿠오카, 그리고 다시 기차로 요코하마로 향했고 그곳에서 배편으로 홍콩에 도착한 뒤 홍콩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항공기를 이용, 암스테르담을 거쳐 목적지인 런던에 도착했다. 장장 보름에 걸친 길고 긴 올림픽 출전 길이었다.

후원금을 받아 겨우 간 첫 올림픽. 역도 김성집과 복싱 한수안이 동메달을 획득, 코리아의 이름을 알렸다. 대한민국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김성집은 52년 헬싱키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78기 끝의 가슴 벅찬 올림픽이었다. 국가대표가 되고도 메달 가능성이 적은 신인이라는 이유로 1972년 뮌헨 올림픽에 나서지 못했던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의 양정모가 금메달을 따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여자 배구가 구기사상 첫 동메달을 획득했고 유도 라이트헤비급의 조재기는 자기 체급에서 메달획득에 실패하자 머리를 빡빡 밀고 무제한급에 도전, 기어코 동메달을 따냈다.

1984LA 올림픽에선 금맥이 터졌다. 동구권 강호들이 불참했지만 대한민국 스포츠가 국민들의 응원 속에 쑥쑥 성장한 덕분이었다. 서향순이 여자 양궁에서 대한민국 여성 첫 금메달을 신고하는 등 레슬링(2), 유도(2), 복싱에서 6개의 금을 쏟아내 10강 대열에 올랐다.

 

배고픔을 먹고 자란 격투기 3형제의 올림픽 효도

레슬링, 복싱, 유도는 1990년대 말까지 대한민국의 국제대회 호성적을 이끈 효자 3형제. 배고픈 게 뭔지를 잊은 지금, 맥이 끊겼지만 3형제는 오랫동안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의 총아였다.

첫 금의 맥을 터뜨린 레슬링은 1984LA 올림픽에서 2개의 금을 만들었다. 그레코로만형 김원기, 자유형 유인탁이 주인공으로 레슬링은 이후 꾸준히 금을 캐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선 그레코로만형의 김영남과 자유형의 한명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선 그레코로만형의 안한봉과 자유형의 박장순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그레코로만형의 심권호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심권호는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 등 레슬링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선 체급을 48kg급에서 54kg급으로 올려 역시 금메달을 획득했다. 박장순은 바르셀로나에서부터 시드니까지 3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여 3개 대회에서 금메달 1개와 은메달 2개를 획득했다. 레슬링의 올림픽 메달 뒤에는 IOC위원인 삼성 이건희 회장의 엄청난 지원이 있었다.

복싱은 레슬링보다 더 일찍 시들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하기 싫은것이 복싱인 탓이다. 신준섭이 LA에서 복싱 첫 금메달을 딴 후 1988년 서울에서 김광선과 박시헌이 금맥을 터뜨렸다. 복싱의 정점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출전한 12체급의 모든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라이트플라이급 오광수, 플라이급 김광선, 밴텀급 문성길, 페더급 박형옥, 라이트급 권현규, 라이트웰터급 김기택, 웰터급 김동길, 라이트미들급 이해정, 미들급 신준섭, 라이트헤비급 민병용, 헤비급 김유현, 슈퍼헤비급 백현만이 전체급 석권의 주인공이었다.

런던 올림픽 동메달로 가장 일찍 메달밭을 갈았던 복싱은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금·은 없이 동메달 2개를 따면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화 김승연 회장의 적극적인 지원이 복싱의 젖줄이었다.

유도의 첫 금은 1984LA 올림픽의 하형주와 안병근. 레슬링, 복싱과는 달리 오랫동안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60kg의 김재엽과 65kg의 이경근이 금 둘로 이었고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여자 유도 72kg급 김미정의 금 하나로 주춤했다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전기영이 남자 유도 86kg, 조민선이 여자 유도 66kg에서 금을 획득하여 회복세를 보였다. 2000년엔 노골드에 그쳐 아쉬움을 주었으나 2004년 아테네에서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가 남자 유도 73kg에서 우승, 유도 금메달의 올림픽 역사를 이었다. 박용성 두산 회장은 유도를 통해 대한체육회장을 지내고 IOC위원이 되기도 했다.

 

서울의 세계 4강은 결코 운이 아니었다

내 나라 내 땅에서 열린 1988년 서울 올림픽. 12개의 금메달로 세계 4강에 올랐다. 2개씩 건진 레슬링, 복싱, 유도의 금메달 6개에 이어 남녀 양궁에서 3, 여자 핸드볼, 여자 탁구 복식(양영자-현정화), 남자 탁구 단식의 유남규가 금을 획득했다. 은메달 10, 동메달 11개로 그 역시 최다였다.

17세의 김수녕이 여자 양궁 개인전에 이어 여자 단체 금메달(김수녕, 왕희경, 윤영숙)까지 획득, 2관왕이 되었다. 여자 양궁은 개인전 금··동을 차지하여 태극기 세 개를 나란히 올렸다. 여자 핸드볼의 올림픽 금메달은 구기 종목 사상 최초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일종의 시험대였다. 서울의 4강이 결코 홈의 이점 덕분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화려하게 그것을 입증했다.

여고생 여갑순이 사격에서 대회 첫 금을 쏘고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마지막 금을 장식했다. 대한민국 선수들이 모은 메달은 레슬링의 금 2, 여자 양궁의 개인, 단체 금 2, 배드민턴 남자 복식(김문수-박주봉)과 여자 복식(정소영-황혜영)의 금 2, 그리고 이은철의 소구경 소총 복사, 올림픽 2연패의 여자 핸드볼, 역도 56kg급의 전병관, 여자 유도 72kg급 김미정 등 금메달 12, 은메달 5, 동메달 12개였다. 종합순위는 7위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22번의 결승싸움에서 7번 이기고 15번을 졌다. 그래서 금메달 7개에 은메달 15개였다. 종합성적 10위로 10강 턱걸이를 했다. 여자 양궁, 유도, 배드민턴이 각각 금메달 2개씩 따냈다. 레슬링의 심권호가 첫 금을 기록했다. 방수현이 마침내 여자 배드민턴 최강의 자리에 올랐고 김동문-길영아 조는 혼합 복식 챔피언이 되었다. 방수현(1972년생)2019년 우리나라 배드민턴 단식 선수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BWF(세계배드민턴연맹)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여자 양궁의 김경욱이 2관왕에 올랐다.

 

새천년의 감격

2000915일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 남북한이 동시에 입장했다. 아리랑 음율 속에 남북이 한반도가 그려진 코리아의 깃발을 들고 등장하자 모든 관중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심권호는 한 체급 올리고서도 레슬링 금메달을 땄다. 여자 양궁은 올림픽 2관왕 4연패의 위업을 쌓았다. 윤미진이 개인전 금메달을 쏘았고 김수녕은 단체전(김남순, 김수녕, 윤미진)의 일원으로 4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모았다. 김수녕은 3번의 올림픽에서 금 4, 1, 1개를 기록했다. 남자 양궁은 단체전(김청태, 오교문, 장용호)에서 금을 기록했다.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새롭게 등장한 국기 태권도는 3개의 금을 수확했다. 남자 태권도 86kg 김경훈, 여자 태권도 57kg 정재은, 67kg 이선희가 각 체급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김영호가 유럽 독무대인 남자 펜싱 플러레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국내 인기종목인 야구와 축구는 엇갈린 길을 걸었다. 야구는 초반 갈지자걸음을 했지만 숙적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획득했으나 축구는 21패로 잘 싸우고도 예선 탈락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과 북은 시드니에 이어 또 동시 입장했다. 대한민국은 금메달 9, 은메달 12, 동메달 9개로 종합순위 9위를 기록, 10위권 복귀에 성공했다.

여자 양궁은 2관왕 5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다. 여자부 개인전 금메달인 박성현은 윤미진, 이성진과 팀을 이룬 단체전에서 금을 땄고 남자 단체도 금이었다. 태권도는 남자부에서만 2개의 금메달(57kg 장지원, 80kg 문대성)이 나왔다. 문대성은 화려한 뒤돌려차기로 KO승을 거둬 태권도는 재미없다는 인식을 순식간에 깨버렸다.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0kg급의 정지현과 남자 유도 73kg급의 이원희는 격투기 금메달의 맥을 이었고 유승민은 16년 만에 남자 탁구에서 금메달을 캤다. 남자 배드민턴 복식 김동문-하태권 조도 금메달을 보탰다.

20088월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13개의 역대 최다 금메달을 획득했다. 금메달의 종류도 다양했다. 야구가 9전 전승을 거두며 남자 구기종목 사상 올림픽 첫 금메달을 만들었다. 박태환과 장미란은 첫 역사를 썼다. 박태환은 수영 자유형 400m에서 금빛 물보라를 일으킨 후 200m에서 은메달을 기록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3관왕이었던 박태환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자유형 400m200m의 은메달을 획득했다.

장미란은 역도 여자 +75kg급에서 인상 140kg, 용상 186kg을 들어올려 종전 세계 신기록보다 3.5kg이 많은 합계 326kg으로 인상, 용상, 합계 모두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다. 태권도는 처음으로 전 종목 우승을 차지, 4개의 금메달을 쓸어 담았다. 여자부의 57kg 임수정, 67kg 황경선, 남자부의 68kg 손태진, 80kg 차동민이었다.

그러나 여자 양궁은 개인전 7연속 우승에 실패했다. 중국의 심한 텃세 탓이었다. 하지만 단체전에선 남, 여 모두 우승했다. 배드민턴 혼합복식의 이용대-이효정, 남자 사격 50m 공기권총의 진종오, 남자 역도 77kg의 사재혁과 남자 유도 60kg급의 최민호도 금메달을 따냈다.

2012년 다시 런던 올림픽. 대한민국의 임원 129, 선수 248명은 서울을 떠난 지 12시간 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64년 전 20여일이나 걸렸던 런던과는 사뭇 다른 여정이었다. 금메달 13, 은메달 9, 동메달 8개도 그때와는 비교 불가. 일본을 제치고 종합 5위를 차지했다.

양궁의 오진혁이 남자 개인전 첫 올림픽 금메달을 쏘았다. 기보배를 앞세운 여자 양궁은 다시 2관왕이 되었다. 사격이 3개의 금메달을 쏘았다. 진종오가 20m 공기권총과 50m 권총 우승으로 올림픽 사격 첫 2관왕에 올랐고 김장미는 25m 권총 금 과녁을 맞췄다. 유도는 81kg급 김재범과 90kg급 송대남, 펜싱은 여자 사브르 개인전(김지연), 남자 사브르 단체(구본길, 김정환, 오은석, 원우영)전에서 금을 획득했다. 양학선은 도마 금메달로 남자 체조의 숙원을 풀었다. 몰락의 길을 걸었던 레슬링은 김현우가 그레코로만형 66kg급 정상에 서며 올림픽 효자종목의 체면을 살렸다. 태권도는 여자 67kg급에서 황경선이 유일하게 금메달을 획득했다.

 

축구는 올림픽 출전 64년 만에 첫 동메달을 따내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은 저조했다. 금메달은 9개로 많이 줄지는 않았지만, 내용이 좋지 않았다. 금메달 9개 중 남녀 양궁의 4, 태권도의 2개 등 6개를 제외하면 남는 건 박인비의 여자 골프, 남자 펜싱 에뻬의 박상영, 사격 남자 50m 권총의 진종오뿐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변죽을 울렸던 양궁은 마침내 전 종목 석권으로 4개의 금메달을 다 모았다. 구본찬과 장혜진이 남녀 개인전에서 우승했다. 여자 단체는 올림픽 8연패의 위업을 이룩했다.

태권도는 여자 선수들만이 금메달을 땄다. -49kg급의 김소희와 -67kg급의 오혜리였다.

진종오는 올림픽 사격 첫 3연패의 꿈을 이루었고 박상영은 남자 펜싱 에뻬에서 첫 금을 만들었다. 박인비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100년 만에 되살아난 골프의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박인비는 올림픽 우승으로 골프 역사상 첫 골든 그랜드슬래머가 되었다.

 

흰 겨울에 핀 금빛 설화

1948130일 스위스에서 열린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대한민국은 코리아이름으로 처음 세계무대에 올랐다. 그렇게 일찍 시작했지만 메달 그림자를 본 것은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이었다. 김윤만의 스피드 스케이팅 1,000m 은메달은 동계올림픽 11번째 참가 끝에 수확한 역사적인 메달이었다.

기대했던 쇼트트랙에선 김기훈이 1,000m와 남자 5,000m 계주(김기훈, 모지수, 송재근, 이준호)에서 금메달을 획득, 아시아 최초의 동계올림픽 2관왕이 되었다. 금메달 2, 은메달 1, 동메달 1개의 대한민국은 단숨에 10위권에 진입했다.

북한은 황옥실이 쇼트트랙 여자 5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한필화 이후 28년만이었다. 한필화는 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3,0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김기훈은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개척자.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쇼트트랙으로 전향한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1,000m에서 다시 우승, 올림픽 2연패에 성공했다. 릴레함메르의 쇼트트랙 금메달은 총 4. 채지훈이 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대한민국 여성 쇼트트랙 개척자인 전이경이 1,000m3,000m 계주(전이경, 김윤미, 김소희, 원혜경)를 석권, 2관왕에 올랐다. 금메달 4개로 종합순위가 6위까지 치솟았다.

199818회 나가노 동계올림픽은 쇼트트랙의 금메달 3, 은메달 1, 동메달 2개로 9위를 기록했다. 전이경은 1,000m에 이어 3,000계주(전이경, 안상미, 김윤미, 원혜경)까지 석권, 2관왕 2연패를 이룩했다. 김동성은 남자 1,000m에서 깜짝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219회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28~24)은 뒷걸음질 친 올림픽이었다. 남자 선수의 메달이 전무한 가운데 여자 선수들이 금메달 2, 은메달 2개를 땄다. 고기현의 1,500m 3,000m 계주만이 금메달이었다.

200620회 토리노 동계올림픽(210~26)은 남북 공동입장으로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대표단(9개 종목 41명 선수)에겐 재기의 동계올림픽이었고 역시 쇼트트랙이 대한민국호를 견인했다. 쇼트트랙의 영웅인 남자 안현수와 여자 진선유가 6개의 금메달을 합작했다. 안현수는 1,000m, 1,500m, 계주 5,000m(서호진, 송석우, 안현수, 오세종, 이호석), 진선유는 1,000m, 1,500m, 계주 3,000m(변천사, 최은경, 전다혜, 진선유, 강윤미)에서 모두 우승, 3관왕이 되었다. 여고생 이상화가 여자 500m에서 5위를 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2010년 벤쿠버 동계올림픽(212~28)은 대한민국의 기념비적인 동계올림픽이었다. 빙상 3개 종목인 스피드 스케이팅, 피겨 스케이팅, 쇼트트랙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금메달은 6개로 토리노와 같았지만 질적인 면에선 토리노를 훨씬 능가했다.

이정수가 쇼트트랙 2관왕이 되었다. 모태범은 대한민국의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상화의 금메달은 더욱더 감동적이었다. 138249, 237850, 합계 7609의 기록으로 대한민국 여자 빙속 사상 첫 메달이자 첫 금메달이었다. 은메달로 시동을 걸었던 이승훈은 10,000m에서 기어코 금빛 질주를 했다. 아시아 최초의 장거리 금메달이었다.

대미를 장식한 것은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완벽한 연기로 일본의 아사다 마오를 멀리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피겨의 금메달은 일찍이 상상도 못한 일. 김연아는 올림픽 우승으로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사상 최초로 그랜드슬램(올림픽+세계선수권+사대륙선수권+그랑프리파이널 석권)을 달성했다.

2014년 소치 올림픽은 다시 내리막길이었다. 이상화는 2연패에 성공했지만 김연아는 실패했다. 금메달 3개가 모두 여자 선수들의 몫이었다. 박승희가 쇼트트랙 여자 1,000m3,000m 계주(심석희, 박승희, 공상정, 김아랑, 조해리)우승으로 금메달 2개를 더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는 세 개의 코리아가 출전했다.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남북단일팀인 COR. 남북단일팀의 국기는 한반도기, 국가는 아리랑이었다.

홈에서의 동계올림픽. 대한민국은 서울 올림픽처럼 4강을 목표로 했으나 쇼트트랙의 부진으로 그 뜻을 이루진 못했다. 금메달 5, 은메달 8, 동메달 4개로 7위였다. 그러나 전체 메달은 17개로 역대 최다였다. 스켈레톤 윤성빈의 금메달 1개를 비롯해 봅슬레이, 스노보드, 컬링의 은메달 3개 등 총 6종목에서 메달을 수확함으로써 동계올림픽의 새 장을 열었다.

이승훈은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쇼트트랙에서는 남자 1,500m의 임효준, 여자 1,500m의 최민정, 계주(김아랑, 김예진, 심석희, 이유빈, 최민정)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500m의 이상화는 마지막 올림픽을 은메달로 수놓았다. 이상화의 올림픽은 4. 강철 심장, 강철 체력을 지닌 철의 여인만이 가능하다. 적어도 12년 이상 최정상의 기량을 유지해야 하므로 그 퍼센티지는 실제로는 계산 할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상화가 유일하다. 순간 승부를 다투는 500m 스피드 스케이팅 네 번의 올림픽에서 2차례 금메달, 1차례 은메달을 딴 이상화. 그래서 다툼의 여지가 없는 빙속여제이며 영원한 레전드다.

 

아시아의 별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국민들은 더 이상 아시안게임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러나 1970~80년대까지의 아시안게임은 스타의 산실이었다. 지금 세계의 별이 그 당시엔 아시아의 별이었다.

축구의 이회택은 팬을 몰고 다녔다. 축구 한일전 영향이 컸지만, 그가 운동장에 서면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선수들이 마구 뒤엉킨 속에서도 이회택은 자유인처럼 속박받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했다. 순발력과 체력을 타고난 이회택은 그 시절 아시아 최고였다.

백옥자는 아시아의 마녀로 떠올랐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투포환 금메달에 이어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16m 28cm의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또 우승, 2연패했다.

조오련은 수영 금메달을 꿈도 꾸지 않았던 시절, 혜성처럼 나타났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400m에서 우승한 후 1,500m까지 우승, 아시안게임 사상 첫 대한민국 수영 2관왕이 되었다. 그리고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1,500m를 석권하여 2관왕 2연패의 기록을 세웠다. 조오련은 현역 시절 한국신기록을 50차례나 세웠다.

최윤희는 특별한 존재였다. 모두들 우리나라는 여자가 수영에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지내던 바로 그 때 등장했다. 10대 초반 태극마크를 단 최윤희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배영 200m, 100m와 개인혼영 200m에서 모두 아시아 최고 기록을 세우며 아시안게임 수영 사상 최초로 3관왕에 올랐다. 그리고 언니인 최윤정은 세 종목에서 모두 은메달을 따냈다. 자매가 나란히 세 종목에서 금메달 3, 은메달 3개를 딴 것이었다.

최윤희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배영 100m, 200m에서 금메달을 건져 두 차례의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 2연패하며 모두 5개의 금메달과 3개의 동메달을 수집했다.

임춘애는 라면만 먹은 것이 아니라 라면도 맛있게 먹으면서달렸다. 눈물의 3관왕으로 알려졌지만 행운의 3관왕이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800m, 1,500m, 3,0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800m는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인도 아브라함의 코스이탈 실수 덕분에 금메달을 차지했다. 주 종목인 1,500m는 실력이었다. 3,000m는 애매했던 경기. 거의 10초나 앞선 기록의 보유자인 중국 선수가 제대로 달리지를 못한 반면 2개의 금메달로 기운이 급상승한 임춘애는 최고의 컨디션을 발휘했다.

 

이제 세계도 좁다

백인천과 차범근이 야구, 축구에서 해외진출의 스타트를 끊었다. 백인천은 일본으로, 차범근은 본고장 독일이었다.

백인천은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즈를 시작으로 1975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1977년 롯데 오리온즈, 1981년 킨테츠 버팔로즈 등에서 19년간 현역으로 뛰었고, 1975년에는 타격왕에 올랐다. 백인천 이후 한동안 수출중지 상태였으나 대학생 박찬호가 곧바로 메이저리그로 향하면서 야구의 해외바람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박찬호는 100마일에 이르는 빠른 공으로 메이저리거 타자들을 농락, 한 시즌 18(2000)을 올리며 IMF로 힘들었던 우리 국민에게 큰 기쁨을 안겼다.

박찬호와 학번이 같은 조성민은 고대 졸업 후 일본 프로야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날아갔다. 일본무대는 한때 한국 출신으로 가득 찼다. 선동열이 주니치로 가면서 문을 열자 이종범, 이대호, 이승엽, 김태균, 오승환, 임창용, 정민철, 구대성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 중 오승환, 구대성 등은 일본을 거쳐 메이저리그로 향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직행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김병현, 서재응, 최희섭, 강정호, 김현수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본고장으로 날았다. 메이저리그의 백미는 류현진, 추신수, 최지만. 류현진은 한화 이글스에서 뛰다가 날아가 2019년 방어율 1위를 기록했고 추신수와 최지만은 처음부터 미국에서 터를 잡았다. 류현진은 LA다저스에서 토론토로 이적한 후 2020시즌을 이어가고 있으며 추신수와 최지만은 텍사스와 탬파베이의 중심타선에서 팀의 공격을 이끌고 있다.

축구 수출 1호 차범근은 아시아 최고의 다리로 1976년 박스컵 말레이시아전에선 5분여 사이에 3골을 집어넣어 1-4로 지고 있던 대한민국을 구하기도 했다. 197926세의 늦은 나이에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축구리그 분데스리가에 진출, ‘차붐신드롬을 일으켰다. 분데스리가 12년간 308경기 98골로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축구는 세계적인 스포츠답게 진출선이 다양했다. 일본은 가르쳐주러 가는 곳이었고 세계 5대 리그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까지 발을 대지 않은 곳이 없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부쩍 잦아졌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설기현, 안정환 등이 문을 열었다. 기성용, 이청용, 차두리 등 월드컵 대표라면 누구나 한 번은 바깥바람을 들이켰다. 차범근 이후 족적이 뚜렷한 주자는 전통의 맨유 멤버로 뛴 박지성, 그리고 손흥민이 그 뒤를 이었다. 그 외에도 이강인 등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이 대거 진출해있어 이제는 국내 축구만큼이나 친숙하다.

 

100년의 진화를 이끈 사람들

대한민국 체육 100년은 항일-해산-광복-한국전쟁-군사정권-민주화 과정을 거치는 굴곡의 세월이었다. ‘건민(健民)’저항을 이념으로 1920년에 설립된 조선체육회가 있었고 광복 후 어지럽고 힘들었던 시절 중심을 잡았던 대한체육회가 있었다. 초대 장두현 회장부터 2016년 취임한 이기흥 회장까지 4034명의 체육회장은 때로는 그 중심에 서서, 때로는 보이지 않는 그늘에 서서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체육회가 걸어 온 길이 순탄치 않았듯 체육회장의 면면도 다양하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직후에는 민족지도자가 많았으나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 출신과 정치인 출신 일색이었다.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엔 경제계가 체육회를 맡았으며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체육회 역시 민간 중심으로 돌아섰다. 역대 회장 중 정치인 출신이 11, 기업인이 6명으로 그 뒤를 이었고 교육자와 관료 출신은 각각 4명이었으며 군 출신도 3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수시로 변한 체육 정국. 그것을 바로 잡고 이겨 낸 것은 소수의 지도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수천, 수만의 체육계 인사들과 체육회 직원들이었다. 큰 빛을 받지 못하면서도 서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선수들을 지원하고 체육 환경을 만들면서 대한민국 체육을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고 왔다. 그들이 있어 대한민국은 스포츠 강국을 넘어 스포츠 선진국으로 향하고 있고 다양성 속에서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이 함께 가는 선진국형 시스템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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