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단메뉴 바로가기 하단 주소 바로가기

체육포털 로고

경희대 신궁 강채영, '제 29회 타이페이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2관왕 등극!
미리보기 이미지

스포츠미디어

  • 사이트 이용문의 페이지로 이동
  • pc원격제어 사이트로 이동

스포츠원 기사

Home > 스포츠미디어 > 스포츠원 > 스포츠원 기사
전국체육대회 100년사 <13회> 새 천년의 전국체육대회
2019.08.02 287
  • 년월호 2019년 7월호

Beyond 100 years

글 배순학 전 대한체육회 사무총장

 

새 천년의 전국체육대회

전국체육대회 100년사 <13>

 

우리나라 스포츠의 젖줄 역할을 해 온 전국체육대회가 100년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인 1920713일 창립한 조선체육회가 이해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된 전국체육대회는 끊임없는 진화를 거듭해 우리나라 스포츠가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20191014일 잠실주경기장에서 화려하게 막이 오를 제100회 서울 전국체육대회를 앞두고 한 세기 전국체육대회를 더듬어본다.

 

세계 8번째 국제규격의 실내스케이트장 개장

새 천년 첫 전국체육대회는 2000214일 개막된 제81회 전국동계체육대회였다. 이때까지의 동계체전 개회식은 보통 설상 경기가 열리는 주경기장에서 치러졌으나 이때만큼은 개·폐회식을 모두 태릉에서 열었다.

바로 태릉 국제실내스케이트장의 개장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1971년 파이프아이스링크를 설치해 개장했던 태릉 옥외빙상장을 1997년부터 150여억 원의 공사비를 투입해 3년여의 공사 끝에 20001월에 완공해 이날 동계 체육대회 개회식이 열리게 된 것. 국제실내스케이트장은 스피드스케이팅은 물론이고 쇼트트랙, 피겨 경기까지 치를 수 있는 다목적 경기장으로 건설되었다. 연면적 27,0672,700석의 관중석과 심판실, 경기진행실, 선수대기실 등이 배치된 최고의 시설로 세계 8번째의 실내 아이스링크였다. 주 링크(400m 트랙)와 보조링크(30m×61m) 2개 면을 갖춘 말 그대로 매머드 스케이트장이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국제규격을 갖춘 실내스케이트장의 개장은 우리나라 빙상, 특히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장족의 발전을 가져오는 촉매제가 됐다. 실내 스케이트장이 개장되었다고 해서 한순간에 기록이 상승되고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계절에 관계없이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지면서 연중 계획적인 훈련이 가능하고 우수 선수들의 발굴이 이루어지게 됐다. 이에 따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이 개장되고 10년 만인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모태범과 이상화가 아시아 선수로서는 사실상 불가능으로 여겼던 스피드스케이팅 남녀 500m에서 꿈의 금메달을 따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대회에서도 꾸준하게 상위권에 오름으로써 우수한 체육시설이 경기력 향상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케 해주었다.

 

전국체전 운영에 변화 요구 나오기 시작해

새 천년의 첫 전국체육대회인 제81회 전국동계체육대회가 태릉 국제실내스케이트장의 개장으로 관심 속에 열렸다면 1012일부터 18일까지 부산광역시에서 열린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이상화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의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81회 전국체육대회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의 리허설이라는 측면에서 이목을 끌었다. 무엇보다 전국체전 개막 11일 전에 막을 내린 제27회 시드니올림픽(2000915~101)에서 사상 처음으로 남북 공동입장을 함에 따라 1년 앞으로 다가온 부산아시안게임에 북한의 참가가 확실시 된데다 북한에서 성화채화까지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마니산 참성단 마니산 성화’, 금강산 옥류동 무대바위 통일의 불’, 포항 호미곶 영원의 불3개 지역에서 채화된 성화는 전국을 일주하며 갖가지 행사를 곁들여 전국체육대회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도 했다.

하지만 새천년의 전국체전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올림픽의 2배 가까운 종목과 선수단이 참가하면서도 올림픽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빡빡한 경기일정, 그들만의 경기로 펼쳐지는 해외동포 선수단의 경기, 개인전보다는 단체전을 선호하는 운영방식 등이 도마에 올랐다. 여기에다 경기도가 1996년 강원체전 이후 5연패를 달성하고 서울이 5년 내리 준우승을 하고 개최지 부산이 1987년 이후 종합 3위에 오르는 등 큰 변화 없는 시도의 순위싸움도 관중들의 흥미를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와 함께 전국체전에 임하는 선수들의 경기력과 매년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기초종목 육성문제도 어김없이 터져 나왔다. 시드니올림픽이 끝난 직후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신기록 39개 중에 26개가 롤러에서 나왔고 수영 남자 자유형 50m에서 단 한 개가 나왔을 뿐 육 상은 대회신기록만 16개에 그치는 등 기대 이하였다.

이런 가운데 한국체육기자연맹이 선정하는 대회 최우수선수(MVP)에는 역도 여고부 5개 체급에 걸린 금메달 15개 가운데 14개를 휩쓴 전라북도 순창고 역도부가 선정됐다. 1980년 전북체전 때 처음으로 만들어진 MVP에 개인이 아닌 단체가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라는 말이 유독 많았던 전국체육대회

모든 일에는 처음이라는 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80회를 넘어선 전국체육대회에서 사상 처음이라는 말은 결코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안을 주 개최지로 충청남도에서 열린 제82회 전국체육대회(20011010~16)와 제주도에서 열린 제 83회 전국체육대회(2002119~15)에서는 사상 처음이라는 말이 유독 많았다.

먼저 충청체전에서는 대전이 광역시로 분리된 뒤 처음으로 지방도시인 천안을 중심으로 8개 지역에서 분산개최됐다. 개최지에 토너먼트 경기종목이 아닌 종목과 전체 메달 점수를 제외한 종합득점에 10% 가산점수를 합하여 종합순위를 정하도록 대회 규정을 개정한 것도 처음이었다. 이 덕분에 개최지인 충청남도가 종합점수 68,996점으로 서울(66,959)에 단 37점차 앞서 사상 처음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경기도와 서울이 종합우승을 주고받으며 우승과 준우승을 하던 전국체전에서 지방이 우승한 것은 1970년 제51회 전국체전에서 경상북도가 우승한 이후 무려 30년 만에 처음이었다. 대회 마지막날 근대5종에서 협회가 제공한 승마용 마필이 잘못 배정돼 소청이 제기되었으나 심의결과 담당자의 단순 실수로 판단해 경기결과는 그대로 인정했는데 이에 따라 종합순위에서 밀려났다고 생각한 종합 2위 서울과 3위 경기도가 종합 시상에 불참하는 오점을 남긴 것도 사상 처음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충남체전에서의 기록은 예년에 없는 기록 풍년을 이루었는데 사격과 양궁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 2개와 세계타이기록이 나왔고 수중에서는 세계주니어신기록도 수립됐다. 한국신기록은 무려 58개가 쏟아졌는데 역도에서 21, 육상에서도 여자 멀리뛰기에서 김수연(충남도청)이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제주도가 1998년 제79회 전국체전을 치른 4년 만인 2002년 제83회 전국체전을 치른 것도 지금까지 사례에 없던 사상 처음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대회와 부산아시안게임으로 전국체전 유치를 희망한 도시가 없다가 뒤늦게 제주도가 개최를 희망해 간신히 유산위기를 넘긴 것이다. 지금까지 전국체전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로비를 벌였던 것과 비교하면 유치시도가 없었던 것도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또 제주도 체전 성화는 마니산이 아닌 사상 처음으로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서 채화를 했다. 성화채화 장소인 경기도에 돼지 콜레라가 발생해 부득이하게 성화채화 장소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2003년 전북체전에서는 개회식을 최초로 월드컵 축구 경기장에서 야간에 개최했고 2004년 충북체전에는 현직 노무현 대통령이 1979년 부마민중항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불참한데 이어 체전 개막식에 사상 두 번째로 참석 하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첫 사례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메가 이벤트를 치르고 난 때문인지 전국체전에 대한 열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언론도 간신히 체면치레 보도만 했을 뿐 예년과 같은 지면할애나 방송 중계도 거의 없어 전국체육대회에 대한 관심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생활체육 종목으로 발 넓히는 전국체육대회

전국체육대회의 종목들은 대부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에 있는 종목들이 대부분이다. 경기방식도 우리나라 나름대로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지만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경기방식을 그대로 적용한다.

예를 들면 역도에서 국제대회에서는 합계로 시상하지만 우리는 인상, 용상, 합계로 3개 종목 각각으로 시상을 하거나 양궁에서 경기방식을 약간씩 변경하고 체급경기는 국제규정에 맞춰 시행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활체육 종목들이 하나씩 전국체육대회 종목으로 편입되는 것은 어쩌면 시대적인 요구상황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열린 제84회 전국체육대회(20031010~16)에서는 바둑과 산악이 처음으로 전시종목으로 전국체육대회에 첫 선을 보인 뒤 제85회 충북체전(2004108~14)에는 수상스키, 공수도, 인라인스케이팅, 마라톤, 스쿼시 등이 전시종목, 시범종목의 이름으로 잇달아 전국체전 종목으로 편입됐다. 86회 울산전국체전(20051014~20)에서는 스포츠에어로빅, 여자검도(단체전), 세팍타크로, 당구를 전시종목으로, 87회 경북체전(20061017~23)에서는 남자 소프트볼, 컴파운드 양궁에 문호를 개방했고 제88회 광주체전(2007108~ 14)에는 마라톤, 야구, 정구, 복싱, 유도, 검도, 소프트볼, 인라인롤러스케이트, 당구, 공수도, 바둑, 양궁, 산악, 수상스키를 동호인 참가종목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또 안티도핑의 국제 추세에 발맞춰 전북체전부터 신기록 수립자와 각 종목 우승자를 대상으로 선별적인 도핑테스트를 처음으로 실시한 것도 전국체육대회가 단순히 국내대회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도핑테스트는 전국체육대회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다. 비록 큰 금액은 아니지만 전국체육대회 사상 처음으로 광고를 유치한 것도 제84회 전국체육대회가 처음이었다. 대한체육회는 주경기장 입식 광고판과 인터뷰 배경에 해당 회사의 광고를 게재하는 조건으로 KT8천만 원에 광고 계약을 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지역 축제와 겸해 열기 되찾기에 안간힘 쏟아

전국체육대회가 전 국민의 관심을 받으며 축제의 장으로 펼쳐지다 개최시도와 출전선수들만의 대회로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부터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시작으로 1983년 프로축구의 출범에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 개최 등은 전국체전의 관심도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즉 국제적인 메가스포츠에 익숙하고 여름 야구와 축구, 겨울 농구와 배구 등 프로종목 경기들이 스포츠팬들의 관심을 끌면서 전국체전은 아예 시선 밖으로 밀려나 버린 것이다. 그나마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이 끝난 직후에 개최되는 전국체전에 스타플레이어들이 참가하면 반짝 인기를 끄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 바람에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는 시도들은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개·폐회식에 아이돌 스타들을 초청하는 등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특히 각종 경기를 직접 대할 기회가 없는 시군들에게 경기종목들을 고르게 분산시키고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와 연계해 축제와 경기를 동시에 즐기게 하는 방안들이 2000년 들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열린 제84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도내 13개 시군에서 고르게 분산 개최하면서 성공적인 대회로 자리매김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주 개최지인 전주는 무엇보다 음식으로 유명한 점을 감안해 음식 축제를 겸했는데 선수단들은 계란 노른자가 들어 있는 계란탕, 계란말이, 콩나물, 노란색이 들어 있는 부침개 등 금메달 색깔과 같은 노란색이 들어 있는 위주의 식사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전주한옥마을에서 사물놀이 이동공연을 비롯해 대회 기간에 약령시 축제, 전통혼례, 풍물놀이 등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다양한 관광코스 개발을 통해 개최지 알리기에 나섰다. 이런 추세는 그대로 각 개최시도로 이어져 경제와 문화의 화합체전을 내세운 2004년 제85회 충북체전은 우수 벤처제품 박람회, 농특산물 장터를 개설해 생산유발효과 1,100억 원, 소득유발효과 398억 원을 얻었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친환경 생태도시로의 변모를 선언하며 불필요한 행사를 대거 축소하는 대신 각종 지역 축제를 개최한 2005년 울산전국체전에서는 맑아진 태화강을 중심으로 처용문화제를 비롯한 구·군 문화제, 음식문화축제, 노동문화제, 온양 옹기축제 등 다양한 축제들이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특히 제한된 경기장 조건으로 다른 지역으로 경기장을 옮겨서 치루고 관중이 거의 없이 선수단만이 참가했던 조정, 카누 경기가 도심을 가로지르는 태화강에서 벌어져 1만여 명의 관중들이 지켜봄으로써 울산 체전의 가장 인기 종목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특정 종목에 한정된 기록 풍년으로 빛바래

전국체육대회에서 기록이 빠질 수는 없다. 어느 해는 기록이 풍년인가 하면 또 다른 어느 해는 흉작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들 기록들이 상당수 특정 종목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2001년 제82회 충남체전에서는 세계신기록 3, 한국 신기록 58, 대회신기록 187개가 나오는 기록 풍년이었지만 한국신기록 58개 가운데는 롤러에서 27개나 되었던 반면 육상에서 1, 수영에서는 단 한 개도 나오지 않아 상대적으로 기록 흉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나마 역도에서 2000년 부산 대회보다 12개가 늘어난 21개가 돼 그나마 체면은 세웠다.

국민들의 모든 관심이 한·일 월드컵축구대회와 북한의 참가로 뜨거운 관심을 끌었던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몰려 있었던 2002년 제주도 체전은 체전기간 내내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분데다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국가대표 선수들이 불참하는 바람에 한국신기록은 제82회 대회 보다 24개가 줄어든 34개에 그쳤다. 2003년 전북전국 체전은 제83회 대회보다 작은 25개의 한국신기록이 나오는데 그쳤고 그마저도 19개가 역도에서 나왔다. 그나마 수영에서 2개가 나온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2004년 제85회 충북체전으로 넘어가면 양궁에서 세계신기록 4, 세계타이기록 1개가 수립되는 등 한국신기록이 29개가 나왔지만 비올림픽종목인 수중에서 21개가 나와 빛이 바랬다. 아테네올림픽 여자양궁 2관왕인 박성현(전북 도청)은 혼자서 세계신기록 3개를 작성해 최고의 스타로 탄생한 체전이기도 했다.

2005년 울산체전은 경기고 1학년으로 전국체육 대회에 첫 모습을 나타낸 박태환이 남자고등부 자유형 400m에서 35016으로 터치패드를 찍어 종전기록(35037)을 무려 0.21초나 앞당기는 한국신기록을 세워 한국수영의 대들보로 등장한 해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남자일반부 개인혼영 200m에서 한규철(전남), 여자고등부 자유형 800m에서 서연정(인천체육고등학교)이 잇달아 한국신기록을 수립해 오랜만에 수영계가 활짝 웃기도 했다.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이 기본종목인 수영과 육상에서 한국신기록이 수립되기는 하지만 전국체전에서 수립되는 한국신기록은 대부분 비올림픽종목인 수중, 롤러 등이 차지함으로써 지나치게 특정종목에 치우쳐 있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아시안게임, 올림픽 스타들의 명과 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열린 해에 개최되는 전국체육대회에는 많은 스포츠팬들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전국체전을 지켜본다. 바로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전국체전에 참가하느냐에 따라 체전의 질이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 이들 스포츠 스타들의 참가는 소속 시도의 성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개최지에는 체전의 흥행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인기선수가 출전하는 경기장에는 평소 TV에서나 보던 선수들을 먼발치에서나마 보기 위해 인산인해의 관중들이 몰려든다. 이처럼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는 스포츠 스타들이지만 실제로 전국체전 무대에서 이들을 보기는 결코 쉽지가 않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출전한 뒤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기도 하고 갖가지 행사에 불려 다니느라 제대로 훈련을 할 여유가 없어 부득이 전국체전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땄지만 정작 전국체전에서 무명의 선수들에게 덜미라도 잡힐 우려가 있어 일부러 포기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2관왕에 오른 박성현이 이해 전국체전에서 세계신기록 3개를 세우며 5관왕에 올라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것은 최상의 시나리오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마찬가지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16년 만에 금메달을 딴 유승민(경북)1, 2회전이 끝난 뒤 준결승전을 앞두고 부상을 이유로 기권, 금메달리스트 유승민을 보기 위해 체육관을 찾았던 2천여 관중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관중들이 썰물처럼 체육관 을 빠져 나간 것은 당연했다. 뿐만 아니라 유도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한국마사회),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정지현은 일찌감치 체전 참가를 포기했고 억울한 판정으로 금메달을 빼앗긴 체조의 양태영은 부상을 이유로 벤치에서 선수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의 스포츠스타들과는 달리 인간승리의 본보기도 있다. 2003년 전북체전 최우수선수(MVP)는 예외적으로 남자 창던지기에 출전해 은메달을 따낸 허희선이 수상했다. 허희선은 3살 때 여물기계에 오른손이 빠져 들어가 오른쪽 손목을 잘라야 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나 불굴의 집념으로 이를 극복하고 전국체전에서 감동적인 활약을 펼쳐 영광의 주인공이 됐다. 전국체전 역사상 은메달리스트가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것은 허희선이 처음이었다.

 

OPEN 대한체육회가 창작한 위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으며
이용 시에는 구체적인 위치를 표시해야합니다.
[05540]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424 올림픽회관   대표전화 02-2144-8114
Copyrightⓒ2016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 all rights reserved.
국민체육진흥공단 본 사업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국민체육진흥기금 지원 사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