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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2016.10.25 381
  • 년월호 2016년 9월호

올해는 여운형 탄생 130주년, 서거 69주기가 되는 해이다.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을 위해, 광복 후에는 건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死後) 반세기가 지난 2005년 3·1절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면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이어서 2008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처럼 여운형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로서 조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하지만 민족지도자로서의 정치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기 때문인지 체육인 여운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여운형의 생애, 체육활동, 체육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한국체육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척박한 시대, 체육으로 독립을 외치다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묘곡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부의 영향으로 신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서울에 와서 각종 학교를 다니며 새로운 문화를 접하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기울며 다니던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여운형은 어쩔 수 없이 학업을 도중에 그만두고 낙향에 후진양성을 위해 힘쓰다가 더 큰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중국 금릉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 유학시절 여운형은 조선에서 익혔던 운동실력을 발휘해 학교대표선수가 되어 학비면제는 물론 대외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는 그의 운동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을 추측하게 한다. 이러한 경력을 인정받아 복단대학의 교수가 되어 체육을 가르치는 한편 중국체육회의 종신회원이 되어 복단대학 축구부를 인솔하여 남양에 원정을 가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여운형은 조선체육회의 이사를 비롯해 조선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서울육상경기연맹, 동양권 투회, 고려탁구연맹회장과 조선유도유단자회, 스포츠여성구락부의 고문에 추대되어 각종 경기대회의 개최는 물론 체육 강연을 통해 조선의 체육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조선축구협회 회장시절에는 일본의 베를린올림픽대회 축구대표 선발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항의를 했다. 1936년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자 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듣고 감격해서 즉시 호외를 발행하라고 지시했다. 

8월 13일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는데 이것이 일장기말소사건의 첫 보도였다. 뒤이어 동아일보 역시 8월 25일자 신문에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하자 경기도 경찰부가 일장기말소사건의 수사에 착수하면서 조선중앙 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도 같이 수사하게 되었다. 결국 동아일보는 8월 27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조치가 내려졌고 9월 4일 조선중앙일보의 자진 휴간과 함께 사장인 여운형은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조선중앙일보는 이내 폐간되고 만다.

 


 

런던올림픽을 1년 앞둔 안타까운 죽음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광복을 맞이한 한국은 즉시 조선체육회의 재건운동을 위해 조선체육동지회를 조직했다. 조선체육동지회는 1945년 11월 12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총회를 열고 취의서와 헌장을 심의하고 만장일치로 여운형을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한 여운형은 1947년 4월 19일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선수의 위대한 공적을 찬양하고 축하하기 위해 우승축하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앞으로 우리민족의 의기와 기백을 다가올 올림픽에서 전 세계에 과시하자고 연설했다. 조선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 런던올림픽에 반드시 참가하기 위해 대책마련에 몰두했는데 그 이유는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7년 5월 9일 조선체육회 산하단체가 YMCA체육관에서 회동하여 여운형, 유억겸, 전경무, 이상백, 정범환, 하경덕, 이병학, 이법용, 민원식 등을 조선올림픽위원으로 선출하고 12일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해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조선체육회 회장과 부회장이 겸하기로 결정 이 되면서 당시 조선체육회 회장이었던 여운형은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운형은 한국이 KOREA라는 국호로 런던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올림픽 개최 약 1 년 전, 괴한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심신이 건강한 세계 속 대한민국의 꿈

여운형의 체육사상은 크게 체육관, 건강관, 국가관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체육관은 생활체육의 보급, 엘리트체육의 편중과 승리지상주의에 따른 체육계의 정화, 체육의 과학적 지도와 조 직의 필요성 등 당시 조선체육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할 것을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체육계의 문제는 오늘날 다루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운형은 심신일원론적인 입장에서 체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특히 체육은 판단력, 책임감, 단결력을 양성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밖에 여성체육, 페어플레이 정신도 강조했다. 그의 건강관은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해서 병이 많았는데 철봉운동을 통해 많은 효과를 보며 건강을 유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철봉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체육에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건강관은 그의 48세 당시 사진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약했던 신체를 다년간 철봉운동으로 많은 효과를 보고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끝으로 국가관은 조선의 세계정상급 선수인 권투의 서정권과 마라톤의 서윤복의 활동을 통해 전 민족이 하나로 뭉쳐 조선인의 기백 을 전 세계에 떨치며 우수성을 과시하자고 했다. 이와 같이 여운형은 일제에 억압받고 있는 조선인의 한을 풀기 위해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했으며 각종 체육단체의 수장으로서 조 선체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자 했다. 또한 당시 조선체육계가 안고 있는 현안문제의 해결책 모색과 세계 스포츠무대에서 조선인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기 않았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자주국가로서 신생독립국인 조선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올림픽대회의 참가를 주도하는 등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진정한 체육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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