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KOREA의 이름으로 여름올림픽에 처음 출전한것은 1948년의 런던대회(제14회), 그이래 2008년 베이징대회까지 모두 15차례 출전했다.(1980년의 모스크바대회는 불참). 말하자면 올림픽대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출전한 우등생 NOC라고 할 수 있는데 각 대회때마다의 활약상도 활발하며 메달을 거의 빠지지 않고 획득하는 우등생 NOC였다.
그 우등생 NOC가 1960년 로마에서 거행된 제 17회대회에 한하여 메달을 따지 못했다. 대회에 대한 대비책이 소홀했기 때문이다.
1960년은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혁명을 일으킨 4.19혁명의 해. 그 혁명의 주체는 대학생들이었다. 로마 올림픽은 60년 8월25일부터 9월11일까지 거행되었다. 4.19혁명 직후의 어수선 했을 때부터 불과 4개월 후에 개막되었는데 대학생선수들이 주축을 이루는 한국선수단으로서 혁명직후의 혼돈속에서 불과 4개월사이에 올림픽의 위하여 본격적인 대비책을 세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례를 들면 마라톤, 로마대회에 4년 앞 선 호주 멜버른 올림픽에서 한국마라톤 유망주 이창훈은 4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22년뒤 1958년의 3회 아시아 경기대회(도쿄개최)에서 그는 우승하였다. 그사이 이창훈은 양정고교를 나와 중앙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이 되었다. 로마올림픽 마라톤 국내예선은 5월에 있었다. 그러나 중앙대의 우상으로 떠오른 이창훈은 4.19혁명의 선봉에서서 4월 한 달을 허송하는 사이 올림픽마라톤 예선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국내예선을 보이코트했는데 지난 4년간의 실적이, 선발된 선수들보다 뛰어났다 하여, 로마대회 대표로 뽑혀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로마 올림픽은 그런 상황 속에 출전한 대회였다. 따라서 메달은 하나도 없이 4위에 입선한 선수 2명만을 지목한, 여느 올림픽에 비하여 가장 참담한 성적을 남긴 대회였다.
4위를 한 2개 종목은 역도와 레슬링. 입선자는 역도 페더급의 김해남(金海男과)과 레슬링 자유형 라이트급의 봉창원이었다.
올림픽에 나갔다 하면 다반사처럼 메달을 따는 오늘날의 올림픽과는 달리 선수단이 거둔 2종목의 4위는 귀중한 것이었으며 특히 봉창원의 4위는 한국레슬링 신호에 등불을 켜준것이다고 하며 국내 레슬링계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한국레슬링은 1930년대에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 성행하여 8.15이후에 이르렀다. 레슬링은 8.15전 일본인 선수들과 겨루어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48년 이후의 올림픽에서도 호성적을 올리리라고 기대되었던 종목이었다. 그랬기에 1948~52에 연이어 올림픽에 출전했으나 성적은 좋지못하였다.
그러던 56년 멜버른대회에서 자유형 밴텀급의 이상균(李相均)이 4위 입선하여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4년이 경과한 로마대회에서 잇따라 봉창원이 4위 입선한 것이다. 레슬링계에서는 잇단 4위 입선은 국내레슬링이 발전을 이룩한 결과라고 보아 선수들이 더한 노력을 기울이면 염원의 메달도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보고 봉창원의 로마에서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실제로 로마대회에 이어 개최된 도쿄올림픽에서 자유형 플라이급의 장창선은 은메달을 차지한바있다.
야성아 봉창원
서울 공덕동에 살던 봉창원이 레슬링에 입문한 해는 1953년 여름, 6.25동안 정전협정을 맺고 휴전을 이룬 직후였다. 1938년생인 봉창원의 나이 16세, 서울의 성도중학 3학년때였다. 그는 타고난 재질을 갖춘 레슬러였던 것 같았다. 6.25동란이 휴전되면서 서울 을지로4가의 한국체육관이 부활하여 어렵게 개관되었는데 그곳에 레슬링 부가 세워져 봉창원은 입문한 것이었다. 입문했을때 봉창원은 이미 레슬링으로 오래 단련된듯한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팔 다리가 고르게 발달되어 있는데다 목이 굵었고 그 목을 받혀주는 어깨와 가슴도 두툼하여 보기만 해도 믿음직스러운 인상을 품었다.
6.25동란중 서울에서 문을 열어 운영되고 있는 학교가 있었으나 전란중이어서 세상이 어지러워 학생들이 정상 등교하여 성실하게 수업을 하길 바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세태였다. 모든 질서가 어지러운 때인데 봉창원에게 부모는 없어 보호자라고는 두 살 연상인 형뿐이었다. 감독자가 성인이 아니니 야성아가 된 봉창원은 동네에서 또래의 개구쟁이들의 우두머리로 방자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거친 생활로 낮밤을 보내는 아우를 보다 못해 형은 숙부인 봉재원씨에게 앞날을 상의하였더니 숙부는 봉창원의 성격과 체격등등을 자세히 묻고는 레슬링을 시키면 사람이 될지 모르겠다며 친구인 한국체육관 레슬링사범 김극환(金克 煥소)을 소개해 준다.
김극환은 1930년대에 양정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육상단거리 선수출신이었으나 양정졸업후 도쿄의 메이지대학에 유학하면서 레슬링을 시작, 기량을 높여 48년의 런던 올림픽엔 한국대표로 출전한 정통레슬링인 출신이었다. 권고를 따라 한국체육관의 사범이 되었는데 후진지도에 성의가 있다고 소문나자 장안의 레슬링 지망생들의 그의 밑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터였다.
당시 한국에는 본격적인 레슬링매트는 하나도 없었다. 김극환은 1945년의 해방이래 근 10년이 지냈건만 일본인이 철수하고 남은 집에 아직도 남아있는 일본 다다미를 구하여 한국체육관 2층의 레슬링 도장에 깔았고 그 위에 미국 텐트를 씌워 구색을 맞추어 입문생들을 받아들였다.
수제자는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하여 수훈을 세운 이상균이었고 서울대사대부고의 이정기, 임광재, 서울대사대체육과생인 최명종, 인창고의 장정호, 영화배우 김지미의 오빠인 김지강등이 봉창원의 선배제자들이었다. 성도중학을 나온 봉창원은 레슬링명문인 서대문의 대신고에 입학하였고 학교교과 시간이 끝나면 바로 하교해서는 한국체육관으로 직행, 훈련에 열중했다. 선배들을 따라 매트위를 뒹굴고 땀 흘리는 생활을 몇 해고 거듭하였다. 김극환 사범이 제자들 가운데 리더십이 있다고 지목하여 주장으로 임명한 선수는 최명종이었다. 최명종은 서울대 사대체육과를 졸업하고는 성북고교에 교사로 부임, 레슬링부를 설립하고 여러선수를 키워낸 우수코치였다. 그러나 체육관 레슬링부 주장인 그가 지도하겠다고 매트에 나오라하면 순순히 지시를 따르는 봉창원은 아니었다.
말수가 적어 과묵하나 고집이 쎄어 남의간섭을 싫어하는 봉창원이었다. 그러나 선배들이 훈련스케줄을 세워주어 마음에 들면 스스로 소화하여 꾸준히 수준을 향상시키는 선수이기도 하였다.
1950년대 중반, 서울의 고교에는 레슬링 붐이 일어 인창고, 사대부고, 성북고, 대신고, 선린상고, 강문고등이 고교연맹을 만들어 자주 대항전을 펼쳤는데 그럴때면 봉창원은 스스로 닦은 기량을 발휘, 전승하다 시피 활약하였다. 봉창원의 레슬링이 뛰어남에 따라 대학레슬링팀의 스카우트대상이 되어 1958년에 대신고를 졸업하면서 성균관대 법과생이 되었다.
그리고 5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경기대회 자유형 라이트급 대표로 선발되어 출전하였다. 그 당시 한국레슬링은 자유형만을 했고 그레꼬 로망은 없었다. 그리고 당시 아시아 레슬링은 일본과 이란이 가장 수준이 높았다.
한국은 6명이 출전하여 대부분이 4위 이하로 처진 가운데 봉창원은 1회전에서 이란선수엔 판정으로 졌으나, 2회전은 필리핀에 이겼고 3회전을 파키스탄 선수와 비겨 벌점 1점을 남긴 채 결승리그에서 일본의 아베에게 폴로 져서, 우승 아베, 2위 이란에 이어 3위를 차지, 입상하였다. 3회 아시아대회에 출전한 한국선수가운데 최고의 성적을 올린 것이었다.
올림픽 4위 입선
아시아 대회라는 바닥은 좁았다. 그러나 이란 일본등 세계의 강자들과 어우른 봉창원의 레슬링에 대한 시야는 넓어져서 1960년6벌점 실격당한 반면 봉창원은 초인적인 분전으로 결승리그에까지 진출하였다.
당시의 레슬링은 6벌점제로 우위를 가렸다. 폴 승을 거두면 무벌점, 판정승을 거두면 1벌점을 주어 보유점이 없어지면 실격패하는 경기방식이었다. 봉창원은 1회전에서 베네수엘라의 수란, 2회전에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리스, 3회전에서 멕시코의 토바, 4회전에서 캐나다의 루미트, 그리고 5회전에선 핀란드의 필도니에미와 대전하여 모두 판정으로 이겼다. 봉창원의 로마올림픽에서의 대진 운은 아주 좋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당시의 세계의 레슬링강국은 앞서 썼듯이 아시아에서는 이란과 일본, 유럽에선 터키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국가들, 그리고 대서양 건너 미국이 강대국이었는데 봉창원은 5회전까지 오르는 사이 용케도 이들 강대국선수들을 피하여 약소국선수들과만 대전하여 모두 판정으로 이겼던 것이다. 앞서 썼듯이 판정으로 이기면 1벌점을 당한다. 5회전까지 거치는 동안 봉창원은 모두 판정으로 이겼기 때문에 그의 벌점은 5벌점, 보유점은 1점뿐이었다. 강호국 선수들은 그사이 서로 치고 받고하며 실격패한 선수들이 많았던 가운데 보유점을 남긴 선수는 봉창원을 포함하여 4명뿐이었다.
4명으로 결승리그를 펼치는데 처음걸린 상대가 유럽선수권자인 불가리아의 에류디모프였다. 둘 모두 보유 점은 1점씩, 봉창원은 선전했으나 판정패, 디모프가 3위가 되고 봉창원은 아쉽게 4위에 머물러야했다. 봉창원은 1962년 자카르타에서 거행된 4회 아시아대회를 끝으로 현역생활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민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