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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세계챔피언 장창선(張昌宣)
2011.11.30 1,703
  • 년월호 2011년 12월호

가난했던 어린 시절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이래 메달리스트는 여럿이 탄생했으나 스포츠의 최고 권위인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만큼 세계챔피언에 오르기에는 벽이 높았고 두터웠는데 그 벽을 깨고 마침내 최초로 세계타이틀을 거머쥔 선수가 레슬링의 장창선 이었다.

 

1942년 인천에서 태어난 장창선이 레슬링에 처음 입문한 것은 야구의 명문으로 알려진 동산(東山)중 2학년 초, 생기발랄한 15세 때였다. 학교건물 한구석에 레슬링도장이 있었는데 당시의 사범은 웰터급 강자로 아시아에 이름이 알려진 임배영(林培榮). 그의 열성적인 지도로 동산의 레슬링부는 야구와 더불어 전국의 강호였다.

 

레슬링부에 들어 간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장창선을 보고 선배들이 소질이 있어 보이니 열심히 하라고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장창선은 키가 작은 까닭에 플라이급을 자신의 체급으로 정했는데 선배들이 소질이 있어 보인다고 평한 이유는 그의 체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장창선의 체력이 강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 좌판에 나물을 놓고 판돈으로 가계를 꾸려야할 정도로 살림은 어려웠다. 따라서 중학에 진학하고 나서부터 학비는 장창선 자신이 마련해야했다.

 

학비를 벌기위해 어린 장창선은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새벽에 신문배달로 동네를 누볐고 학교가 끝나면 찹쌀떡을 팔며 인천 시내 중심부를 돌았고 여름에는 아이스케이크 통을 메고 뙤약볕에 뛰어다니기도 했다.

 

아침, 저녁으로 중노동인 아르바이트를 이겨내는 가운데 몸은 자연히 단단해 졌다. 그 힘을 바탕으로 스승 임배영의 지도를 충실히 소화하자 선배들은 기특한 마음으로 장창선을 좋은 선수라고 평가한 것이다.

 

한편, 순발력을 키우기 위해 타구에도 열중했다. 레슬링은 몸놀림이 빨라야 한다. 마침 동네에 제물포 중학에 다니는 주창복(周昌福)이란 탁구소년이 있었다. 나중에 국가대표선수를 거쳐 대표선수단 코치까지 맡은 인물이다. 주창복은 장창선에게 탁구를 가르칠 때 "공을 놓치지 말고 따라 다녀라"라고 강조하였다. 드라이브를 건 탁구공은 무서운 스피드를 지니는데 그 공을 따라잡자면 당연히 몸이 빨라야 한다. 주창복의 지도를 받으며 착실히 탁구를 배운 덕에 장창선의 몸놀림은 아주 빨라지고 레슬링 기술도 많이 늘어났다.




서울에서 더욱 강해져

 

장창선은 동산고 1학년 때 서울의 인창고 레슬링부에 스카우트되었다. 동산고 1학년 때의 초여름, 서울 장충동의 육군체육관에서 레슬링의 전국신인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장창선은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 대표로 출전한 이정기(李正基)의 동생, 이한기(李漢基)와 막상막하의 열전을 펼친 끝에 석패했다. 레슬링 명문 가문 출신인 이한기와 대등한 경기를 하는 것을 보고 인창레슬링부는 유망주가 나타났다고 판단, 장창선을 스카우트한 것이다.

 

당시 전국의 레슬링 유망주들은 서울 을지로 4가의 한국체육관에 모여 기량을 닦았다. 장창선은 서대문의 인창고를 다니면서 학업이 끝나면 밤늦게까지 한국체육관의 매트를 뒹글며 훈련에 매진하였다.



1962년, 자카르타에서 거행된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장창선은 대표선발전에서 우승하며 출전해 아시아의 여러 강호들을 물리쳤다. 우승한 일본의 하라다(原田)에 이어 2위를 했다. 아시아 2위는 자랑할 만한 성과였지만 장창선은 자카르타에 모인 일본선수들을 통하여 레슬링의 세계가 넓고 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창선은 아시아의 여러 대표들에게는 어렵지 않게 이겼지만 플라이급의 우승자 하라다에겐 폴로 졌던 것이다. 레슬링에서의 폴패는 완패를 뜻한다. 폴이란 대전하는 상대의 두 어깨를 눌러 매트에 닿게 했을 때 쓰는 명칭으로 그야말로 완승을 뜻한다. 같은 작은 몸집의 하라다에게 폴패를 당했으니 굴욕적인 것이었다.



장창선이 레슬링에 대한 눈을 뜨고 세계적인 선수로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가을에 겪은 일본에서의 수업 덕이다. 그 해 가을, 도쿄에 인접한 소도시 지바(千葉)에서는 이듬해의 도쿄올림픽에 대비한 레슬링 프레올림픽이 열렸다. 올림픽에 앞서 레슬링을 운영하는데 있어 문제점들을 발견하기 위해 예비시험을 치루는 경기였다.



대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여러 선수들이 출전했고 장창선은 4위를 했다. 예비대회였기에 세계 최강들이 출전하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장창선의 성과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결과였다.



그의 실력은 프레올림픽에 이은 도쿄 메이지대학에서 갖은 합숙훈련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한국레슬링협회장은 김극환(金克煥)이었다. 김극환은 메이지대학 레슬링부 초창기의 부원으로 일본인 고참부원 대부분은 김극환의 후배들이었다. 그런 연고로 프레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대표 선수들은 약 한달 동안 재일동포 집에 머물면서 메이지대학 레슬링도장에서 일본인 부원들과 강화훈련을 가졌다.



메이지대학은 명문답게 부원들도 많았다. 플라이급 부원만해도 21명이나 되었다. 첫날 그들과 대전했는데 장창선에게 지는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스파링을 거듭하면서 장창선의 실력은 눈부시게 발전하며 합숙훈련 보름만에 랭킹 18위로 올랐고 한 달 훈련을 끝내고 귀국할 무렵에는 4위로 올라있었다.



세계무대를 향해 눈을 뜬 장창선에게 국내에서는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따라서 그가 도쿄올림픽에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대표로 뽑혀 출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올림픽 2위에 오르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장창선의 컨디션은 좋았다. 레슬링 플라이급의 한계체중은 52kg이었다. 장창선의 평상시 체중은 그보다 10kg 많은 62kg. 62kg을 58kg까지 줄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52kg까지 빼는 것이 큰일 이었는데 1962년 4회 아시아경기대회 이후 여러 번의 국제경기에 출전하면서 경기 일에 맞춰 적정체중을 유지하는 요령을 터득, 올림픽을 앞두고는 어렵지 않게 52kg을 만들었다. 동료선수들과 연습을 할 때 몸이 가볍다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컨디션이 최상에 올라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쿄올림픽에서의 장창선은 대진 운도 좋았다. 당시의 레슬링경기는 6벌점제로 운영되었다. 선수 개개인에게 6점이 주어지고 폴로 이기면 무벌점, 지면 4점이 깎여 보유점은 2점밖에 남지 않는다. 판정으로 이기면 1점이 깎이고 지면 3점을 잃었다. 비기면 양쪽 모두 2점씩 깎기는 경기방식 이었는데 만약 1~2회전을 모두 판정으로 지면 3점과 3점, 합해서 6점, 당초 주어진 6점을 모두 잃어 실격 당한다.
그렇게 실격선수가 속출한 끝에 마지막까지 보유점을 유지한 선수끼리 리그전 또는 결승전을 펼쳐 순위를 결정하였다.



당시의 세계적 레슬링강국은 소련, 미국, 터키, 이란, 일본 등이었다. 장창선의 대진운이 졸았다는 것은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용케도 강국선수들과는 한 번도 대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창선이 대전한 선수는 1회전 호주, 2회전 파나마, 3회전 부전승, 4회전 파키스탄, 5회전 프랑스 선수였다. 장창선은 이들을 모두 판정으로 물리쳤다. 6회전이 결승이었는데 장창선은 아직 보유점을 2점이나 갖고 있었다. 소련, 미국, 이란, 터키 등 선수들은 1회전부터 5회전까지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보유점을 모두 잃고 탈락하는 사이 보유점을 가진 선수는 장창선과 일본의 요시다 요시가쓰, 단 둘 뿐이었다.



장창선은 결승에서 요시다를 이겼다면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시다는 국제경기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으로 경기 개시의 휘슬이 울리자마자 장창선에게 전광석화같이 태클을 걸어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고 1점을 선취하였다.



그리고는 선제공격으로 따낸 우세점을 끝끝내 유지하여 판정승으로 우승, 장창선은 은메달을 목에 걸은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마침내 세계정상에 서다



장창선은 올림픽을 끝내고 귀국하여 국민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은메달을 차지했다는 것을 도약을 다짐하는 기폭제로 삼아 한 차원 더 높은 금메달을 향해 도전하기로 결심하였다. 나이는 아직 24세, 세계 레슬링계의 추세도 파악돼 정상이 결코 멀리 있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장창선은 2년 후 미국의 톨레도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제패하겠다고 결심하였다.



1966년 6월 5일 드디어 톨레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가 개막되었다. 컨디션은 좋았다. 체중감량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힘도 넘쳐흘렀다.



그러나 톨레도에서의 상대는 도쿄올림픽 때처럼 약자들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1~2회전은 모두 폴로 이겼으나 3회전 상대는 가츠우라라는 일본선수였다. 일본을 대표한 만큼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이어서 장창선은 악전고투 끝에 비겨 2벌점을 기록했다.



4회전의 상대는 터키선수. 터키는 레슬링 강국중의 하나여서 기량이 정상권 이었지만 장창선도 이제는 관록을 갖춘 명장이다. 판정으로 이겨 벌점 3. 그리고 5회전에서 소련선수를 만났다. 악을 쓰고 맞싸운 결과 판정으로 이겼다. 5회전까지 거치는 사이 출전선수 모두가 6벌점 이상을 기록하며 실격했고 보유점을 가진 선수는 일본의 가츠우라, 미국의 선더스, 그리고 장창선 3명뿐이었다.



이제 3명이 리그전으로 승부를 가려야한다. 먼저 장창선과 가츠우라가 대전했다. 이번에도 비겼다. 다음은 미국 선더스와의 대전, 장창선은 2라운드에서 선더스를 넘어뜨리고 뒤로돌아 상대방의 두 무릎을 꿇게 했다. 분명한 득점 장면이었지만 심판은 득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벌어진 대회였던 만큼 홈 어드밴티지가 작용하여 선더스를 장창선과 비기게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세 선수 모두 비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면 계체량으로 순위를 가려야 하는데 최종경기인 가츠우라 대 선더스의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장창선은 경기장에 달린 사우나에 미리 들어가 땀을 빼고 나온 상태에서 저울에 올랐다. 장창선이 가장 가벼워서 우승, 2위는 선더스, 3위는 일본의 가츠우라에게 돌아갔다.



한국 최초의 엘리트스포츠의 세계챔피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우승직후 인천의 어머니 김복순여사로 부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감격에 겨운 어머니는 "잘했다 장하다"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장창선은 어머니의 칭찬에 "어머니, 이제 우리 고생 끝났어"라고 화답하였다.



장창선은 귀국후 레슬링 한길로 매진하여 대한레슬링협회 전무이사와 부회장을 거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고 2000년에는 스포츠맨 최고의 영예인 태릉선수촌장에 임명되어 시드니올림픽, 2002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 대비한 대표선수 관리와 경기력향상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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