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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8 유치한 스포츠외교의 대가
2012.10.11 528
  • 년월호 2012년 10월호

여남(與南) 조상호(曺相鎬 1926~2007). 인터넷에서는 그를 '정치인' '정무직 공무원' '10대 국회의원' '체육부장관'정도로 소개한다. 그렇다. 그는 선수출신의 체육인이 아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위원장(1980~1982)이었던 1981년, 동서화합과 국운상승의 계기가 된 88서울올림픽을 유치했다. 두 달 후에는 86아시아경기도 끌어왔다. 1988년에는 체육부장관(1987~1988)으로서 제 24회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대한체육회와 KOC 고문, 세계한민족체전 위원장, 국민생활체육회협의회 상임고문, 2002년 월드컵축구 조직위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다. '남쪽에 베풀라(與南)'는 뜻의 호를 가진 조상호 장관.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 마지막까지 한국 스포츠 발전을 위해 여생을 바친 진정한 체육행정가이자 스포츠외교의 대가였다. 물론 서울올림픽의 유치와 성공 개최는 정 관계, 재계, 체육계의 많은 분들이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낸 결과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조상호 회장, 조상호 장관이 있었다. 서울올림픽 유치와 개최를 중심으로 5년 전 타계한 그의 체육 인생 역정을 되짚어본다.

광주서중 시절 별명 '포켓'
…영어실력 뛰어나 통역장교로 6.25 맞아
조장관은 1926년 11월29일 전남 담양군 대전면 행성리 309번지에서 아버지 조희인, 어머니 국도순씨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 수창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호남의 명문 광주서중(5년제)에 입학, 줄곧 모범학생으로서 성장했고 학교 성적 또한 발군이었다. 특히 영어 과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 별명이 포켓 사전을 뜻하는 '포켓(Pocket)'이었을 정도. 중학 시절 그는 "영어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고 말할 만큼 영어 과목에 자신감을 보였으며 사전 한 권을 거의 외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광주서중 시절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이 동기생이었으며 정래혁 전 국회의장은 1년 선배다.
조장관은 1945년 일본 규슈대에 진학했으나 조국 광복으로 귀국, 광주 미군정청 관재처 적산관리과에서 근무하다 1948년 군에 입대, 통역장교로 6.25전쟁을 치렀다.

미국 조지아대에서 수학
…5.16이후 박대통령을 지근거리 보좌
1953년 초등군사반 통역으로 도미, 조지아대 야간부에서 수학했고 1957년 귀국 후 육군 무관 연락실 실장으로 근무했다. 1958년에는 조지아대 학점이 인정돼 조선대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5.16 혁명 후 중령으로 예편,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다 1963년부터 11년간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을 역임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1974년 8월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으로 청와대의 많은 비서진이 물러나면서 조장관도 박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으나 박대통령은 그를 그 해 12월 주 이탈리아 대사로 발령했다. 그 때 나이 48세. 조장관은 1977년 로마의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 상주 수석대표도 겸했다. 1979년 2월 10대 국회의원(유정회)으로 선출돼 귀국할 때까지 4년여를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1979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체육계와 인연
…올림픽 유치 시동
조장관과 체육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1978년 9월 서울에서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68개국 1,500명 참가)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박종규 대한사격연맹회장은 '우리도 이제 올림픽을 치러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됐다. 청와대 경호실장 출신으로 박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박회장은 당시 박대통령에게 올림픽유치 구상을 보고, 결심을 받은 뒤 1979년 2월 대한체육회장을 맡았다. 박회장은 "대한체육회의 스포츠외교는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 조상호에게 맡겨라"는 박대통령의 당부에 따라 국회의원 신분인 조장관을 대한체육회 부회장,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로 지명했다. 당시 조장관은 올림픽 공용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는 물론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6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박대통령, 올림픽 유치 재가 뒤 10.26사태로 서거
…체육회장 맡아
한편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은 1988년 올림픽의 서울유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1979년 8월 국민체육심의위와 9월 국무회의 의결 등을 거쳐 박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았으며 10월8일에는 정상천 서울시장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서울시는 88올림픽 유치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0.26 사태로 박대통령이 서거하자 박종규 회장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올림픽 유치 움직임은 잠잠해졌다.
박종규 회장의 활동이 제한되자 조부회장이 회장 직무대행을 맡아 사실상 대한체육회 업무를 총괄했으며 7월14일 대한체육회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제26대 대한체육회장 겸 KOC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는 박종규 회장이 조부회장의 능력을 높이 평가, 신군부에 차기 체육회장감으로 강력 추천한 것이 크게 주효했다는 후문이다.

신군부 등장, 박종규 회장 퇴진
…올림픽 유치 반대 여론 거세져
조회장의 첫 번째 시련은 7월18일부터 8월3일까지 열린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의 불참문제였다. 이미 한국 미국 일본 등 서방 66개국이 대회 불참을 결정한 상태였지만 88올림픽을 유치해야할 나라가 대회기간 중 열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를 비롯 국제경기연맹들의 총회까지 외면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조회장은 당시 문교부 등 정부 측 책임자들을 설득, '대회 참가는 안 되지만 국제회의에는 참석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이에 따라 김세원 KOC부위원장 등 체육회, 경기단체 대표와 국제심판들은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 적극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조회장은 모스크바 올림픽 기간 중 신임 사마란치 IOC위원장과 베를리유 사무총장 등 IOC고위급 인사들과 만나 교분을 쌓았다. 7월26일 귀국한 조회장은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모스크바 방문 성과와 대한체육회 임원 구성 원칙에 대한 보고를 했다. 이어 8월5일 이규호 문교부장관에게 전두환 대통령의 실제인 전경환 새마을운동본부 사무총장 등을 이사로 하는 집행부 구성안을 보고하고 1년 여 앞으로 다가온 1988년 올림픽 유치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9월1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조회장은 국내외 체육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 올림픽 서울유치의 당위성을 설명하느라 바쁜 일정을 보냈다. 9월28일 부친상의 아픔을 당했으나 슬퍼할 겨를이 없을 만큼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했다.
하지만 박대통령 서거와 박종규 회장 2선 후퇴이후 경제기획원, 문교부 등 정부 부처와 서울시, 경제계, 언론계, 심지어 체육계의 고위인사들까지 부정적 견해를 보이면서 올림픽의 서울 유치는 국내에서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특히 1981년 4월16일 올림픽 유치대책 위원장인 국무총리의 주재아래 열린 대책회의에서는 막대한 대회 개최 경비 등을 감안, 서울시가 올림픽 유치 후보도시에서 사퇴하는 방안까지 거론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됐다. 이 회의에는 안기부장, 경제기획원 장관, 외무, 문교부 장관, IOC위원, 대한체육회 회장 등 8명이 참석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회장은 4월23일 대통령의 실제인 전경환 대한체육회 이사를 불러 올림픽 유치활동에 대한 경과를 설명해주고 전경환 이사가 대통령에게 현재의 상황을 직보하도록 요청했다. 전경환 이사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4월27일 이규호 문교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체육관계자에 따르면 올림픽은 유치신청만 해도 세계적으로 엄청난 홍보효과가 있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데 왜 패배의식을 갖고 물러서려고 하느냐"고 질책하면서 적극적인 유치활동을 주문했다고 한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유치업무 급물살
…외국 지도자들도 적극 협조
이후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경제기획원, 외무부, 문교부 등 정부부처, 서울시, 재계, 체육계 등이 일??령의 말 한마디에 하마터면 흐지부지 될 뻔했던 올림픽 유치 업무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 당시 상황으로서는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었다. 5월16일?? 48개국의 우리나라 공관에 올림픽유치 교섭 훈령이 내려가면서 올림픽 유치 업무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정부부처 등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을 얻은 조회장은 세계적인 스포츠 지도자들과의 섭외를 통해 올림픽 유치 가능성을 더욱 높여 나갔다. 조회장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은 인사로는 국가올림픽위원회 연합회(ANOC) 조사단의 돈 밀러(미국) 리처드 팔마(영국), IOC조사단의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멕시코), 국제경기연맹 연합회(ISF)의 아드리안 폴렌(네덜란드)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 등을 들 수 있다.

밀라노 ANOC 총회에서 유치제안 설명
…IOC위원장 등 감동
특히 폴렌 회장은 1954년 유엔한국재건단(UNKRA) 일원으로 한국에 상주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던 인물로 조회장 손위 처남인 유종 대한석탄공사 이사와 막역한 사이였다. 폴렌 회장은 적자올림픽을 치른 몬트리올을 예로 들면서 과도한 시설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권유하는 한편 국제스포츠계에 영향력이 큰 인사들을 조회장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폴렌 회장의 소개로 만난 인사는 서독의 다슬러 아디다스 회장, 멕시코의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 ANOC회장, 쿠웨이트의 세이크 파하드 아시아경기연맹(AGF ?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전신)의장, 이탈리아의 프리모 네비올로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 회장 등이다. 조회장은 이들과의 친분을 발판으로 국제스포츠계의 지평을 넓혀갔으며 1981년7월26일 이탈리아 밀라노 ANOC 총회에서 명연설을 했다. 내용은 88올림픽 서울유치의 당위성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사마란치 IOC위원장 등 147개국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폴렌 회장은 조회장의 스피치에 감동, IOC총회에서도 이 같은 제안 설명을 한다면 올림픽 유치는 '떼 논 당상'이라고 극찬했다. 1982년 12월 한국에 온 아프리카 스포츠 최고회의(SCAS) 아브라함 오르디아 의장(나이지리아)도 88올림픽의 서울유치는 79년 밀라노 ANOC총회에서 조회장이 행한 공식연설이 국면 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바덴바덴 10일 작전' 돌입
…52대27로 나고야 꺾고 유치 성공
88올림픽 개최지 결정 10일을 앞둔 9월20일 서독 바덴바덴에 도착한 조회장은 1백여 명의 한국유치대표단과 함께 투표권을 가진 80여명의 IOC위원을 상대로 치열한 득표전을 펼쳤다. 이른바 '바덴바덴 10일 작전'. 9월22일 대한항공 스튜어디스와 미스코리아 출신의 안내로 문을 연 전시관 운영에서 나고야를 압도했고 29일 최종 프레젠테이션에서도 조회장의 연설이 IOC위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운명의 날. 9월30일 오후 2시부터 투표가 시작됐으며 오후 3시45분 사마란치 위원장은 52대27로 서울이 88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됐음을 공표했다. 역사적인 순간 조회장 등 1백여 명의 유치단은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며 서로를 얼싸 안았다.

물 한컵 놓고 부친 1주기 제사
…박세직 장군 "형님 건국 이래 가장 큰일"
한편 바덴바덴 도착 다음날인 9월21일 아침 유치단의 재벌급 기업인이 조회장에게 "돈은 얼마를 써도 괜찮으니 올림픽만큼은 꼭 유치해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조회장은 "충정은 이해하겠으나 금전공세를 펼칠 경우 국제적 망신을 살 수 있다."고 정중히 사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회장은 또 9월28일 부친의 1주기를 맞아 밤 11시30분 호텔 방에서 탁자에 물 한 컵을 올려놓고 "아버님. 올림픽을 꼭 유치할 수 있도록 저에게 힘을 주세요. 실패하면 체육회장을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조회장은 10월5일 귀국,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베푼 다과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는데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인 박세직 장군이 자신보다 7살 연상인 조회장을 얼마 뒤 수경사로 초청, "형님. 건국 이래 가장 큰일을 하셨습니다."라고 경의를 표하면서 식사 접대를 했다고 한다. 박장군은 이후 총무처장관, 체육부장관을 거쳐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서 86아시아경기와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86아시아경기도 만장일치로 서울 유치
…올림픽 유치 두 달 만에 이룬 또다른 성과
조회장은 88올림픽 서울 유치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86아시아경기대회의 서울유치에 나섰다. 이미 1980년 4월 AGF에 유치신청서를 제출한 상태였으나 이라크와 북한도 유치신청을 마쳐 3파전 양상을 띠고 있었다. 다행히 1981년 들어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을 이유로 유치를 포기했으나 문제는 북한이었다. 북한은 AGF조사단의 한국 방문을 막는 등 집요한 방해공작을 벌였다. 하지만 대세가 불리해지자 북한은 개최지 결정투표를 9일 앞둔 11월17일 "88올림픽을 유치한 남한이 아시아경기까지 유치해서는 안 된다. 제3국이 개최해야한다."며 유치의사를 사실상 철회했다. 이에 따라 한국이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유치를 단독 신청한 가운데 조회장은 11월22일 AGF총회가 열리는 인도 뉴델리에 도착, 세이크 파하드 AGF 의장등과 세부사항 조율에 들어갔다. 조회장은 파하드 의장에게 단독신청인만큼 투표 없이 만장일치로 개최지 결정을 해달라고 설득했으며 68명의 대표가 참석한 11월26일의 AGF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개최지를 서울로 확정짓는데 성공했다. 9월30일 바덴바덴의 올림픽유치에 이어 약 두 달 만에 뉴델리에서 다시 아시아경기를 끌어온 것이다.

전대통령에게 통금해제 건의
…스포츠과학연구소 출범 등 업적
조회장은 올림픽 유치 직후 전두환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많은 IOC위원들이 한국의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서울올림픽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고 보고했으며 전대통령은 관계자들에게 통금해제를 검토하도록 지시, 12월 국회 내무위의 의결을 거쳐 1982년 1월5일 시행 37년 만에 야간통금제도가 폐지됐다.
조회장은 또 대표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서는 스포츠과학의 뒷받침이 절실하다고 판단, 대한체육회장으로 선임된 지 5개월만인 1980년 12월29일 태릉선수촌에 이긍세 서울대교수를 소장으로 하는 스포츠과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이 연구소는 현재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체육과학연구원으로 발전, 우리나라 스포츠가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에 이어 2012년 런던하계올림픽에서 거푸 세계 5위의 금메달 순위를 기록하게 하는 동력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7년 제6대 체육부장관 취임
…88올림픽 성공 개최에 앞장서
1982년 7월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에게 대한체육회 회장직을 물려준 조회장은 서울올림픽조직위 부위원장 겸 사무총장으로 변신, 86아시아경기, 88올림픽 준비의 선봉에 섰으며 1987년 7월에는 제6대 체육부장관에 취임했다. 조장관은 자신이 체육회장 재임시 앞장서 유치했던 서울올림픽의 성공개최를 위해 주무부서 장관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특히 서울올림픽 요트경기장으로 사용할 부산 수영만의 오염 방지를 위해 시설비를 국고에서 지원, 해결했다. 서울올림픽 때에는 신변 안전을 이유로 인천 앞바다에 자국 군함을 정박시켜놓고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버틴 소련선수단을 설득해 전원을 올림픽 선수촌에 입촌시키기도 했다.

건강한 노후, 여생을 체육단체 봉사에 헌신
…81세 일기로 영면
1988년 12월 체육부장관직에서 물러난 조장관은 대한체육회 상임고문(1989년) 세계한민족체전위원장(1992년) 2002년 월드컵 유치위 집행위원(1993년)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상임고문(1994년) 2002년 월드컵 조직위 집행위원(1996년) 2002년 월드컵 조직위 개최지 단체협의회 공동의장(1998년)을 역임하는 등 여생을 우리나라 체육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79세 때인 2005년에 79타의 '에이지 슈트(Age Shoot)'를 기록할 정도로 수준급 골퍼였던 조장관은 만년에도 남다른 건강을 유지했으나 81세 때인 2007년 8월25일 갑작스런 뇌출혈로 별세,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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