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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테니스 프로 이덕희
2016.05.12 1,398
  • 년월호 2016년 5월호

불과 몇 년 전,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한국 스포츠가 그건 안 되는 줄 알았다. 수영, 피겨 스케이팅, 펜싱, 스피드스케이팅 등에서 한국 스포츠가 올림픽 무대 금메달 시상대에 서리라고 예상한 일반인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박태환, 김연아, 김영호, 김지연, 이상화 등이 이를 보기 좋게 뒤집었다. 개인종목뿐만 아니라 월드컵 단골 출전종목 축구나 야구 등에서도 한국 스포츠의 약진은 눈부시다. 하지만 드물게 진화가 느린 종목도 있다. 테니스가 대표적이다.

 

 

혈혈단신으로 WTA 테니스 무대에

1980년대 초만 해도 일본 테니스는 한국에 비해 한 수 아래였다. 하지만 일본은 지난해 니시코리 게이(26)가 ATP(세계남자프로테니스투어) 랭킹 4위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수십 년째 답보상태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남자복식 우승자 정현(20·IMG)을 비롯해 주니어 세계 최강급 홍성찬(19·브리엄컴퍼니), 장수정(21) 등의 선전으로 최근 한국테니스 앞날에 녹색불을 밝히기는 했으나 이들도 수십 년전 이덕희(63), 이형택(40) 활약에 비하면 아직 미흡하다. 특히 한국 최초의 테니스 프로 이덕희! 머리에 밴드를 질끈 동여매고 라켓 하나 달랑 든 채 런던 윔블던으로, 파리 롤랑 가르스로 세계 테니스 무대를 단신 종횡하던 그녀는 남녀 통틀어 모든 면에서 한국 최초였고 아직까지도 한국 최고로 통한다. 이덕희의 WTA(세계여자프로테니스협회) 기록은 실로 휘황찬란하다.


그녀를 첫 테니스 프로라 하는 것은 WTA가 주최하는 프로대회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말이 쉽지, 투어 대회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시절이었다. 이덕희는 1979년 미국에 테니스유학 떠나 스폰서도, 매니저도 없이 혼자 프로선수 등록하고 대회에 나갔다. 몇 년 후 여자골프 구옥희가 이덕희처럼 혼자 일본과 미국에서 좌충우돌한다. 1988 서울올림픽으로 한국 국가체육이 정점을 향해 달리는 가운데 개인 스포츠, 프로 스포츠로 다양화하던 시기의 파이오니어들이었다.

 

한국인 최초 그랜드슬램 대회 출전 그리고 첫승
이덕희는 1953년 생, 한국 테니스 메카인 전북 남원출신이다. 남원여중 1학년 때 체육교사 권유로 라켓을 잡았고 곧바로 서울로 테니스 유학, 중앙여중·고 선수로 전국 주니어 코트를 석권한다. 이때 만난 평생 멘토가 고(故) 장호 홍종문(전 대한테니스협회 회장)이다. 장호는 스승이자 아버지로 이덕희를 보살폈다.


“홍(종문) 회장님은 아버지 이상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항상 기량 향상을 위해 뒷바라지 해주셨습니다. 아마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 테니스에 이덕희란 이름 석자도 없었을 겁니다.”


이덕희는 홍종문이 단장인 1972년(19세) 전일본주니어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여자 단, 복식을 모두 석권한다. 이어 같은 해 12월 대망의 호주오픈에서 역사를 쓴다. 이덕희는 단식 1회전에서 홈코트인 팸 휘트크로스(호주)를 2-0(6-4, 7-5)으로 물리쳐 한국인 최초 그랜드슬램 대회 출전과 그랜드 슬램 첫 승을 기록한다. 함께 호주오픈에 나선 양정순(69·한국여성테니스연맹 전무)도 1회전 승을 거두고 나란히 2회전에 진출했으나 이덕희보다 여섯 살 연상이어서 ‘최연소’기록은 양보했다. 이덕희의 프로 경력이 만개하기 위해선, 그러나 8년을 기다려야 했다. 대한체육회와 대한테니스협회가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원했기 때문이다. 국가체육, 금메달이 개인 성취보다 당연히 우선시되던 시기였다. 요즘 잘 나가는 한 당구선구는 몇 년 전 “제가 혼자 연습해서 대회 우승하는 거예요. 나라가 해 준 것 없어요.” 그 말이 맞기도 하다. 이덕희도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테니스 광이자 대표적인 국가체육 지휘관인 고(故) 소강 민관식(전 대한체육회장)으로 대표되는 압도적인 분위기, ‘체육공화국’ 전성기였다.


이덕희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양정순과 함께 단체전 금메달을 땄고 개인전 복식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4년 후 1978 방콕아시안 게임에서도 단·복식 2관왕과 단체전 은메달을 딴다. 이때 별명이 아시아 테니스 ‘여제’. 하지만 아마추어로서 ‘메달 의무’를 마친 뒤 그녀는 ‘테니스 집시’가 된다. 세계 각지를 떠돌며 강호들에게 혼나고 배우고 또 일격을 가하기도 하면서 프로페셔널로 단련된다. 소속도, 스폰서도 없는 이 신원미상 떠돌이 실력자를 언론에선 ‘집시’로 불렀다.

 

 

 

1981년 US오픈 16강 진출 파란
이덕희는 성균관대, 경희대 대학원, 조흥은행을 거쳐 1979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프로선수로 등록한 뒤 80년 4개 그랜드슬램대회에 모두 출전한다.


1981년 US오픈에서는 프랑스오픈 우승자 버지니아 루지치(루마니아)를 격파, 16강에 올라 세계 무대에 풍파를 일으킨다. 올해 초 호주오픈 1회전서 정현이 ATP 남자 랭킹 1위인 노박 조코비치(29·세르비아)와 맞붙어 관심을 모은 적 있다. 결과는 정현의 0-3 완패. 하지만 수 십 년 전 비슷한 조우에선 동양의 무명이 당시 WTA 5위의 톱프로 루지치를 제압(2-1)해 코트를 발칵 뒤집었다.
“빌리 진 킹, 나브라틸로바, 크리스 에버트 등 수많은 강호와 경기를 치렀지만 루지치가 가장 기억납니다. 1982년 캐나디언오픈과 US오픈에서 그를 연속해서 만났습니다. US오픈에서 풀세트 접전 끝에 힘겹게 이겼더니 이후 그 사람이 코트 밖에서 나와 마주칠 때마다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이더라고요(웃음).”


‘US오픈’이란 이름은 종목을 떠나 한국과 인연이 깊다. 지난 1998년 ‘맨발의 박세리’가 득의의 우승 트러블 샷으로 당시 외환위기에 처한 실의을 후련히 날린 것도 LPGA(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 US오픈이다.


1980년대 초반 지구촌 테니스 전성기의 WTA 메이저대회인 테니스 US오픈 역시 현지에선 그만한 파괴력이 있었다. 이덕희는 1981년 US오픈 여자단식 본선1회전(128강)에서 수산 레오(호주)를 2-0(6-3, 6-4)으로 완파하고 기분좋게 스타트한다. 2회전(64강) 상대인 수산 매스커린(미국)에겐 첫 세트를 내준 뒤 2-1 역전승(6-7, 6-4, 7-5)을 거뒀고 3회전(32강) 상대 루지치와는 한 세트 씩 주고받은 뒤 마지막 듀스접전 끝에 2-1(6-1, 4-6, 7-5)로 신승했다. 당연히 현지 언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미국 테니스매거진은 이덕희를 “겁 없는 아시아 다크호스”라고 썼다. 이어 4회전(16강) 상대는 WTA 3위인 하나 만들리코바(체코·54). 이덕희보다 아홉 살 연하인 당시 19세 소녀 만들리코바는 이덕희를 2-0(6-1, 6-0)으로 완파하고 내쳐 우승컵까지 거머쥔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했다. 이덕희의 메이저 16강 진출은 남자 프로 이형택이 ATP 메이저인 2000년 US오픈(여기서도 ‘US오픈’!) 16강에 오를 때까지 19년 간 대한민국 테니스 사상 유일한 고지였다.
이 해 이덕희의 WTA랭킹은 34위까지 올랐다. 대한민국 프로테니스 사상 세계랭킹 50위 이내에 진입한 이는 현재까지 이덕희를 포함해 이형택(36위) 조윤정(45위) 등 단 세 명뿐이다. 2016년 4월 현재 샛별 정현의 ATP랭킹은 84위다. 이덕희가 기록한 ‘랭킹 34위’는 아직까지 한국 프로테니스가 오른 가장 높은 고지다.  


이덕희는 이듬해인 1982년 마침내 투어 첫 승을 거둔다. WTA투어 미국 플로리다 포트마이어 대회에서 남아공의 이본 베어마크를 2-0(6-0, 6-3)으로 이기고 한국인 최초 투어 챔피언에 등극한다. 32강부터 결승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 경기를 모두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2-0씩으로 이긴 완승 행진이었다. 우승상금 5천 달러. 이 역시 이형택이 2003년 ATP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세계 4위 페레로를 꺾고 우승할 때까지 21년간 유일한 투어 승리 기록이었다. 

 
이덕희배 국제주니어대회의 탄생
1981, 1982년은 이덕희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녀는 1983년(30세) 열네 번째 그랜드 슬램인 US오픈을 끝으로 현역 은퇴한다. 이후 미국 LA에 정착해 재미사업가 조풍언 씨와 결혼하고 사업가로 승승장구한다. 와인체인점 ‘벤덤’, 가든스위트호텔, LA 근교 골프리조트 캘리포니아컨트리클럽 등이 그의 사업체다. 하지만 2001년 이덕희는 다시 코트로 돌아온다. 필생의 역작 ‘이덕희배ITF국제주니어테니스선수권’(이하 ‘이덕희 배’)과 함께다. 이 대회는 2001년 그녀가 사재 6천만 원을 털어 만들었다.


 Q 대회를 왜 만들었나?
 A “이덕희 배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국내에 국제주니어대회가 없었다. 장호배, 소강배 등 훌륭한 대회는 많다. 그러나 한국 테니스가 성장하기 위해 주니어들이 국제 랭킹을 쌓을 수 있는 국제대회 개최가 절실했다. 1980년대엔 프로스펙스가, 1990년대엔 나이키가 국제주니어대회를 지원했지만 모두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좀 오래 가는 거 하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 한국에서 선수 생활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그걸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Q 보람 있나?
 A “보람 뿐인가. 젊은 선수들이 스매싱할 때 나도 소녀가 된다. 테니스는 언제나 내 기쁨이다. 대회를 치르기 위해 국가대표 여성테니스 선수 출신 모임인 ‘마당회’(회장 정복희)가 기간 내내 자원봉사로 도와준다. 진행, 경기수준, 통역, 숙소에서 여느 외국대회 못지 않다. 정현, 홍성찬 등도 이 대회 우승자다. 언젠가 우리 후배들이 세계를 제패할 것으로 꼭 믿는다.”(언론 인터뷰 요약)


이덕희배 대회 취지는 ‘테니스 꿈나무들이 세계 랭킹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는 대회를 통해 국제무대를 향한 발판이 되고자 함’이다. ITF(국제테니스연맹) 주최의 해외 대회는 매년 수백 개지만 경비 등을 감안하면 대부분 주니어들에게 해외출전은 사실 ‘그림의 떡’이다.


이덕희배는 이들에게 15년째 안방에서 세계 수준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덕희배는 주니어대회 중 가장 낮은 등급인 5그룹(G5)으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2그룹(G2)으로 격상됐다. 이는 다른 국제 주니어대회에선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빠른 성장 속도다. 올해 제주, 순창, 김천 등에서 국제대회가 열리지만 이 대회는 모두 4, 5그룹이고 국내에서 이덕희배가 유일한 2그룹 대회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회 진행을 맡은 ‘마당회’ 역할이 컸다.


“외국 선수들을 비롯해 코치들이 이렇게 훌륭한 주니어 대회는 처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어요. 저도 세계 유명 대회를 많아 다녀봤지만 이만큼 진행이 원활한 대회는 없는 것 같아요. 아마 마당회가 선수 출신이라서 선수의 입장으로 생각한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겠죠. 무척 고맙고 자랑스럽죠”

 

이덕희가 뿌린 씨앗이 맺은 열매
이덕희는 여성 체육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여성체육대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김운용 전 체육회장의 아호를 따 ‘윤곡체육상’이었으나 최근 규모를 확대시행하며 이름이 바뀌었다. 재미사업가이자 DJ 정권 유력한 후원자로 알려진 남편 조풍언 씨와는 2년 전 사별했다.
초창기 테니스 선수 중 남원 출신이 많다. 이덕희, 이순오, 김춘호 등. 이렇게 된 데는 전 실업테니스연맹 장영보 회장의 공이 결정적이다. 장영보는 성균관대 테니스 선수 시절부터 고향인 남원고와 남원여고를 중심으로 테니스를 보급했다. 남원여중 1년생 이덕희의 포핸드 스매싱과 주력을 보고 서울 유학을 주선한 것도 그였다. 전북 출신 정치거물인 소석 이철승이 테니스 매니아여서 일찍부터 일본에서 훈련용 라켓과 공을 사다 남원 주니어들을 뒷바라지 했다든지 김태정 전 법무장관이 남원지청장 재직 시 군단위에 불과한 남원에 6면 코트 시설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것이 남원 테니스 발전을 가속시켰다. 이덕희는 이 토양에서 자연스레 조기교육에 접했고 홍종문, 장원보 등 멘토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행운아이기도 하다.


이형택이 이덕희의 US오픈 16강과 투어 우승 기록에 이르는데 약 20년이 걸렸다. 이형택과 그의 ‘키즈’인 정현, 홍성찬의 나이도 20년 정도 차이 난다. 이제 한국 테니스 중흥 시기가 온 걸까.


“제가 뛰던 70년대만 해도 일본은 테니스에 관한 한 우릴 따라오지 못했어요. 지금은 상황이 반대더군요. 하지만 우리라고 못 하라는 법 없어요. 협회 차원에서 장기적 지원책이 잘 마련되고 있고 미국 오렌지볼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주니어 기량은 이미 세계적이에요. 관리만 잘 하면 돼요.”


이덕희는 낙관하고 있다. 하긴 스포츠도 사회발전을 따른다. 골프, 피겨, 체조 등 개인종목 기량이 그간 긴 잠복기를 거치긴 했으나 세계수준으로 거의 동시에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하나, 테니스만 남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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